트로이(Troy)

Troy Tevfikiye Köyü17060 intepe/Çanakkale Turkey

   트로이의 현재 지명은 <히사를륵>이고 성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트로이의 첫발굴은 1865프랑크 갈버트에 의해서였다.  갈버트는 슐리만에게 이곳을 보여주게 되고, 1870년 슐리만에 의해 본격적인 <히사를륵>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다. 15m두께로 쌓인 퇴적물에서 트로이는 가장 아래쪽에 묻혀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퇴적층을 일곱 개의 층으로 분류해 맨 아래층을 트로이 1,  트로이 2순으로 명명한다.

  

  이 퇴적층에서 호메로스가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렀던 각종 장신구와 황금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에는 독일의 고고학자인 빌헬름 돌프펠트가 발굴작업에 합류했고,  발굴 과정에서 퇴적층의 연도가 정정되기도 했으며,  트로이 7에서 거대한 성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중간에 세계대전 등으로 발굴작업이 중단되기도 하다가 1988년에 재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오랜 발굴 작업을 통해 트로이는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아온 지역이었음이 드러났다. 때로는 화재로, 지진으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 위에 또 새 도시를 건설해 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인데, 미국 고고학 연구팀인 블레겐은 이를 모두  9개의 층으로 구별했다.

 

  트로이 전쟁  :  올림포스 산에 헤라여신과 아테나여신,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 황금사과가 떨어진다. 거기에는 최고의 미녀가 이 사과를 갖게 된다는 신탁이 쓰여 있다.  사과를 서로 가지려는 세 여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 심판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맡게 되는데, 그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선택해준 댓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파리스에게 주는데, 그녀가 바로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레오스의 부인 헬렌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트로이로 몰려 들어온다. 이 연합군에는 아가멤논메넬레오스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약스,  파트로글리스 등이 포진했다. 10년을 끈 이 전쟁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전사를 해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오디세우스가 퇴각을 하면서 목마를 만들어 전리품으로 트로이에 바친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오고목마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그리스의 군대가 밀려들어오게 된다. 트로이는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아이아네스는 지중해를 떠돌다가 이탈리아에 정착해 훗날 로마제국의 선조가 된다.

  

  트로이는 BC48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고, 로마의 건국자 아이아네스는 자기 고향인 트로이에 관심을 갖는다. 카이사르에 의해 아테나 신전이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오데온 극장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진다. 4세기에 이르러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항구가 메워지면서 트로이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고, 12세기에 셀축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트로이의 유적지에는 1970년대에 만든 트로이 목마 모형이 가장 먼저 반긴다.  목마에 올라 사진도 찍고,  로마인 복장을 빌려 입고,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도 가져보며 이곳을 즐겨본다.  목마 옆에는 발굴 현장 사무실로 사용하던 작은 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는 트로이 전체 모형 그림이 있다그림의 왼쪽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항아리와 수도관이 보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커다란 성벽이 나타난다.  이것이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벽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이 이 성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죽어갔다는 그곳이다.  트로이 67의 성벽으로 길이가 약 90m,  높이는 약6m이다.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면 트로이로 들어가는 성문 자리가 나온다.  그 외 성내 주택들의 흔적과 아테나 신전, 멀리 차낙칼레 해협과 트로이의 평원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하는데 보진 못했다. 북쪽에 있었던 트로이 항구 가까운 곳에 아킬레우스와 아약스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나 알 수가 없다. 아테나 신전 아래 최근 발굴되어 지붕을 씌워놓은 트로이 2’도 보인다. 이 성의 바로 바깥에서 발견한 슐리만의 보물들은 독일로 가져갔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이 약탈해 가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고 한다. 성 앞에는 지금은 막혀 있는 옛날 우물이 있고,  출구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실내 극장인 오데온이 나온다최근의 발굴작업을 통해 이 주변에서 로마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트로이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도그 전의 페르시아도,  사도 바울도 이 지역의 항구를 거쳐 유럽으로,  아시아로 진출했고,  흑해로 들거나,  에게해로 나오려면  반드시 차낙칼레 해협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 지역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을 것이다.

   <트로이>는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실리크언덕> 위에 있다.

 트로이목마는 이젠 트로이유적의 상징이 되었다.

터키대학생들의 현장체험학습으로 트로이 목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트로이목마>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었고, 계단이 경사가 심해 노약자들은 오르기가 힘들게 되어 있었다.

트로이목마 앞에서 그 당시 로마인의 복장으로 기념촬영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트로이의 유적지에는 1970년대에 만든 트로이 목마 모형이 가장 먼저 반긴다. 목마에 올라 사진도 찍고, 로마인 복장을 빌려 입고,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도 가져보며 이곳을 즐겨본다.

 

선행형님 부부도 트로이목마 앞에서 로마장군의 복장으로 추억을 남긴다

 

 

   트로이의 현재 지명은 <히사를륵>이고 성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트로이의 첫발굴은 1865프랑크 갈버트에 의해서였다. 갈버트는 슐리만에게 이곳을 보여주게 되고, 1870년 슐리만에 의해 본격적인 <히사를륵>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다. 15m두께로 쌓인 퇴적물에서 트로이는 가장 아래쪽에 묻혀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퇴적층을 일곱 개의 층으로 분류해 맨 아래층을 트로이 1, 트로이 2순으로 명명한다.

 

   오랜 발굴 작업을 통해 트로이는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아온 지역이었음이 드러났다. 때로는 화재로, 지진으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 위에 또 새 도시를 건설해 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인데, 미국 고고학 연구팀인 블레겐은 이를 모두 9개의 층으로 구별했다.

   아테나 신전 아래 최근 발굴되어 지붕을 씌워놓은 트로이 2’도 보인다. 이 성의 바로 바깥에서 발견한 슐리만의 보물들은 독일로 가져갔고,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이 약탈해 가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고 한다

 

   성 앞에는 지금은 막혀 있는 옛날 우물이 있고, 출구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실내 극장인 오데온이 나온다. 최근의 발굴작업을 통해 이 주변에서 로마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데온

 

 

 

 

로마장군의 복장으로 기념촬영

 

 

 

차나칼레(Canakkale)

트로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차나칼레를 거쳐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카닥항구>까지 버스로 이동한다.

<트로이>에서 <카닥>까지는 차나칼레해협을 멀리 바라다 보며 1시간 가량 버스로 이동했다.

<트로이>에서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카닥항구>를 이용하여 <겔리볼루항구>까지 40분간 배를 타고 이동한다

배에서 출발지인 <카닥>을 바라다 본 풍경

 

조용한 <카닥항>

 

 

 

 

<마르마라해>와 <에게해>를 잇는 중간 지점의 <차나칼래해협>

<차나칼래해협>을 지나는 유조선

 

 

 

 

 

40분 가량 배를 타고 도착한 <겔리볼루항>

 

<겔리볼루항구>

 

 

겔리볼루 풍경

 

터키여행 내내 우리와 함께했던 대형버스도 배로 이동한 후 하역되고 있다.

<겔리볼루항구>

<겔리볼루항구>

 

<겔리볼루항구>

<겔리볼루항구>